[me]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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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인문학부터였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최전방에서 북한군을 바라보며 복무했고, 남는 시간엔 코딩 테스트 문제를 풀고 책을 읽었다.



『총, 균, 쇠』, 『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 책들은 나의 1년 반 동안의 사유를 지탱해준 친구들이었다. 세상의 구성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이 내 일상을 채워나갔다.



전역 전날, 그 책들을 택배로 보내며 무게를 재보니 21kg. 부탁드렸던 전포대장님께 쪼인트 까였던 기억이 난다.



그토록 기다렸던 전역 후에는 한동안 놀기도 했지만, 곧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복학하려 했던 대학은 범지구적 바이러스에 녹아내렸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작은 프로젝트들을 만들었고, 포트폴리오를 꾸리던 중, 어느 새벽, 예상치 못한 전화가 왔다. 평소라면 말을 아끼던 동생의 전화는 곧 가족의 위기를 알렸다.



동생은 학업에 집중해야 했고, 원래 몸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집을 지키셨다. 나는 병원에서 노트북을 켰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파일럿이 꿈이었고, 유체역학에 흥미가 생겼다. 대학교에서 GE로 들어와 항공우주학과를 목표로 했고, NASA가 외국인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움츠러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쪽으로 반쯤 정신나간 공학도들이 모인 공과대학은, 내게 매일이 흥분되는 시간이었다. 생각만 하던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같은 전공의 친구와 기숙사에서 게임 개발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우리는 스포어와 비슷한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게임은 생명의 기원, 환경에 따른 변화, 그리고 진화의 방향을 다루는 일종의 우주적 시뮬레이션이었다. 나는 이 공상에 몰입했고, 인문학에서 시작해 공학과 자연과학으로 이어졌던 나의 고찰이 이 게임 기획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했다.



게임 안의 생명은 단순한 픽셀이 아니었다. 탄소 기반, 규소 기반, 혹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생명체. 온도, 압력, 자외선, 중력, 자기장 — 그 어떤 물리량도 생명의 조건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다시 천문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우주는 무작위로 채워지지 않는다. 초기 조건, 질량 밀도, 암흑에너지의 비율, 시공간의 팽창 속도, 내가 만들고 싶던 세계는 이 법칙 위에 세워져야 했다.



은하계의 거리, 항성의 주기, 행성의 궤도, 기체와 액체의 분포, 그리고 그 속에서 생명이 어떻게든 피어나는 방식. 진화는 무작위가 아니며, 동시에 반드시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 그 아이러니를 시뮬레이션에 담아내고 싶었다.



처음에는 단순했던 기획이 어느 순간, 내가 지나온 사유의 궤적과 맞닿아 있었다.

동시에 빠져든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며 느꼈던,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던 음악의 아름다움과 깊이였다.



나는 게임 개발과 함께 작곡을 시작했다.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멀리 갔다. 병원에 있으면서 작곡을 하고, 물리학과 천문학을 함께 공부했다.

그 모든 것이 일관성 없어 보였고, 나는 내가 비생산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나에게 “그 시간 동안 도대체 뭘 했느냐”며 묻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열심히 살고 있었다.

갑자기 스키장에 알바로 들어가 스키와 보드를 배우고 자격증을 따 강사로도 일했다. 코딩할 줄 안다고 했다가 웹사이트를 만들어야 했고, 공모전에 나가고 싶어 팀을 짜기도 했다.

그러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병을 했다. 1년 동안은 그저 아버지 곁에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생명을 지켰고, 장애는 남았지만 살아계신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시간은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전역은 22년, 공부하다 보니 23년, 그리고 24년. 그해엔 작곡에 몰두하며 여행을 다녔다.

나는 어떤 성취에 목말라 있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고, 멀리 나아간 이들을 보며, 그들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처한 현실은 계속 어긋났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참 많은 걸 해냈다.



결국은, 묵묵히 걸어나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배움을 향해 간다. 누군가는 늦었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현실이 이상을 자주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조용히 움직이려고 한다. 이런 나를 세상이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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